대장부 가는 길 :: 2008/06/13 22:51
몇개월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연히 mbc에서 방송중인 시사 다큐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은 대충 '은퇴한 정치인들의 궁핍한 인생'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현역 의원 시절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한 세도가들이었지만 은퇴한 후에는 경제적 궁핍과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하루 하루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뒷방 늙은이'들이 되어버린 가련한 노인들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고, 또한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자신의 지역구에 이른바 기름칠을 하지 않는 이상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그 당시의 냉혹한 정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 정치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이 가산을 탕진하거나 이른바 검은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검은 돈에는 늘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곤 했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정치적인 양심이 있었다면 바른 정치를 위해 이 돈을 쓰지 않고서는 정치 생활을 연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정치 현실'을 먼저 개혁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추악한 현실에 매스를 들이댄 적이 없다. 그저 현실 정치라는 허울에 몸을 맡기고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해 갔을 뿐이다.
그래서 그 프로를 보는 내내 여러 이유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그들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냉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이었고,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정치인으로서 정치 민주화나 투명도에 기여한 바는 극히 적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시대적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불합리한 정치 현실에 별다른 문제의식이나 해결책에 대한 고민 역시 없었을 사람들이었으리라.
그런 곱지 않은 시선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리모콘을 가지고 다른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한 노회한 정치인의 이야기가 버튼을 누르던 나의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여든 조금 덜 되었을까? 조금 더 되었을까? 아내와 함께 콘테이너를 개조한 쪽방에서 생활하는 노인네.
정치하다가 가산을 전부 탕진하여 집이고 회사고 전무 팔아먹은 무책임한 인간.
아들의 회사가 부도가 나고 결국 아들이 이를 비관하여 자살하였을 때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린 무능력한 아버지.
무릎이 불편한 아내가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가 콘테이너를 개조한 쪽방에서 한잠을 자는데도 한달에 100만원씩 나오는 정부 보조금을 민족 통일 어쩌고 저쩌고 하는 뭐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무실의 운영비에 쓰고 있는 무정한 남편.
나로서는 이해도 안가고, 용서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정치적 비전은 이상이라기 보다는 허위 의식에 가까웠다. 그는 대한민국을 이러저러한 이념이 실현되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의식을 가진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그저 한자리 차지해서 아랫 사람들을 호령하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정치 중독증 환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저 아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야 자기가 벌린 일이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생활이라지만 저 할머니는 무슨 죄가 있어서 저 고생을 묵묵히 인내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그 할머니에게 인터뷰를 시도하던 피디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그 할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남편분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지금 몸도 불편하신데 정부 보조금 나오는 걸로 계단 없는 방으로 이사 가시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자 그 할머니는 - 참 인상이 곱고 여린 할머니였는데- 수줍지만 단호만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장부 가는 길을 아녀자가 어찌 막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음악이 흐르면서 그 퇴역 정치인이 허리를 꽂꽂하게 세운 채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민족 통일 어쩌고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랬다. 내가 보기에는 정치 중독증 환자에 무책임한 가장에 불과한 노인네가 그 할머니 눈에는 늠름한 대장부요 하나뿐인 낭군님이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동안 만큼은 그 할아버지는 민족의 미래와 국가의 안위를 위해 헌신하는 일대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순간 만약 누군가가 저 할머니처럼 나를 좋은 사람이라 믿고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준다면, 나 역시 목에 칼이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꽂꽂하게 세운 허리를 굽히는 일은 절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 하나 부럽지 않던 퇴물 정치인의 일생이 너무나도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정치할 생각이 있냐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
Posted by 얼씩우





